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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책이야기]작가의 사랑 _ 문정희 시인의 시집소소한이야기 2018. 9. 18. 22:33728x90반응형
문정희, 고정희
좋아하는 시인들입니다.
'정희'를 좋아하고 있네요.
이 포스팅을 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민음의 시 245가 문정희 시집 작가의 사랑입니다.
읽으면서 특히 눈에 들어왔던 시 몇편 옮겨 봅니다.
작가의 사랑에 담긴 시들이 궁금하시다면 시집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봄 회의
이유도 없이 가슴 미어지는
이 슬픔을 들어다가
오는 봄 곁에나 가벼이 앉히고 싶다.
암소가 보리밭 너머 먼 산을 향해 일어서고
추위를 견딘 소나무가
청년의 어깨처럼 듬직해지는
봄날, 나의 슬픔은
초록 블라우스를 입고
새로 핀 꽃들 속에 앉아
민주적으로 봄 회의나 했으면 좋겠다
오늘 회의 주제는
뜬구름 같은 사랑! 그런 주제 말고
푸른 눈썹을 달고 흔들리는 저 나무들처럼
말보다 몸으로 실천하자는 주제로 정하리
봄과 슬픔을 투시하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온몸으로 발언하리
사실 암소가 보리밭 너머 먼 산을 향해 일어서는 그 느낌은 모르겠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평생 도시에서 살면서 콘크리트 덩이와 아스팔트 사이에서 숨시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봄날에 슬픔이 초록 블라우스를 입고 꽃들 속에 앉아 있는 그림은 얼추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살아 있음에서 다시 생각이 멈춰버립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
오늘 저녁은
지금까지의 저녁이 아니다
놀랍지 않은가
이 낭떠러지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일
나침반도 없이 내리꽂히는
그까짓 도려움
그까짓 불안
죄의식과 허위와 허위의 아름다움과
슬픈 쇠사슬의 겸허로
뜨겁고 단순하게
절박하게
온몸이 떨리는 살아 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일
태어날 때 이미 내 손에 도착한
선물이
꽃잎의 시간이
무수한 축복의 뿌리를 달달고
이제야 본다는 것
놀랍지 않은가
구체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뜨겁고 단순하게 절박하게 온몸이 떨리는 살아 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일
이라고 하면 안되겠지요? 뜬구름 같은 사랑! 그런 주제 말고 말하자 했으니까요.
뜬구름 같은 사랑이 아니라 온몸이 떨리는 살아 있음으로 사랑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이라 우겨보고 싶습니다.
연애없는 인생임에도.
빈둥빈둥
나는 방목한다
빈둥빈둥
내가 사랑하는 어슬렁어슬렁이다
모래와 모래 사이
창조가 넝쿨처럼 뻗쳐 오는 것도
버겁고 시들해서
속도와 움직임 다 버린다
그냥 햇살
그냥 해찰이다
시간의 독잭재가 다그치는 교훈들과 강요
흔한 정보와 움직임에 대한 예찬
의미와 의미로 덧없는
생산과 숫자에 나는 멍들었다
잠언들의 경고와 속삭임을 벗언어나
채찍 앞에 무릎을 휘청이는 나
일어서라, 파이팅! 파이팅!
일어서서 어디로 가란 말인가
나는 모르겠다, 몰라도 좋다
피 묻은 마우스를 뱉고 가죽 글러브를 벗고
빈중빈둥 햇살 속으로
이제 벌거벗은 너마 오면 된다
사과만 나눠 먹으면
통쾌하게 에덴에 당도할 것이다
워라벨을 외치는 자, 워라벨 따위는는 잊고
피 묻은 마우스를 뱉고 가죽 글러브를 벗고 빈둥빈둥 햇살 속으로 벌거벗고 가서 사과를 나눠 먹고 에덴에 당도하시길
애인
-김수임
남자가 법정에 묶여 나왔다
이 여자가 당신의 무엇이오?
애애인입니다!
공적으로 이 말을 쓴 남자는
이 나라에서 그가 최초일 것이다
애인? 아무 장치도 바람도 없는
위험한 꽃 같이
부도덕하고 위험해서
어쩐지 더욱 아름다운
애인? 딸도 누이도 아내도 어어머니도 아닌
땅 위의 족보에는 도뭊무지 없는
황홀하지만 황량한 이름
소나기보다 흔해 빠진 한 줄기 사랑
별보다 더 높은 것 같지만
실은 아무 권리 없는 이름을
선물 받은 그 여자는
한강변 돌자갈 위에서
쇠사슬을 끌고
여간첩의 이름으로
총살형을 받았다
서구 언론이 동양의 마타하리라 하지만
그녀는 하늘 아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여
완성을 이룬 여자
그것 말고 더 큰 명예가 없다는 듯이
기꺼이 사라진
애인이라는 이름의 여자
김수임 1911-1950
이화전문을 나온 여성으로 한국전쟁 직전 해방 공간에서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당함
김수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느낌입니다. 곡시는 이야기 한편 들은 것 같습니다만, 서글픈 마음이 듭니다.
애인의 주인공 김수임과, 곡시의 주인공 김명순, 모두 오래 전에 저 세상으로 갔으나, 그녀들의 명복을 간절히 빌고 싶어졌습니다.
곡시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
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자신을 깨워, 큰 꿈을 이루려고 떠난 낯선 땅
내 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타국에서
그녀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조롱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근대문학의 선봉으로
새 문예지의 출자자로 기생집을 드나들며
술과 오입의 물주였던 당대의 스타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문장'지에
소설 「김연실전」을 연재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성폭력,
비열한 제2의 확인사살이었다.
이성의 눈을 감은 채, 사내라는 우월감으로
근대 식민지 문단의 남류(男流)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폐허, 조광의 필진으로
잔인한 펜을 휘둘러 지면을 채웠다.
염상섭도 나카니시 이노스케라는 일본 작가도 합세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그들은 책마다 교과서마다
선구와 개척의 자리를 선점했다.
인간의 시선은커녕 편협의 눈 하나 교정하지 못한 채
평론가 팔봉 김기진이 되었고
교과서 편수관, 목사 소설가 늘봄 전영택이 되었고
어린이 인권을 앞세운 색동회의 소파 방정환이 되었다.
김동인은 가장 큰 활자로 문학사 한가운데 앉았다.
처름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
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
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
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였다.
소설 25편, 시 11편, 수필 20편, 희곡, 평론 170여 편에
보들레르, 에드거 앨런 포를 처음 이 땅에 번역 소개한
그녀는 처참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매장되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70여 년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데로 또 학대해 보아라.
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뛰어나온다.
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
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김명순 1896-1951(?)
호 탄실. 1917년 춘원 이광수에 의해 등단한 소설가.
많은 작품을 썼지만 일본 유학 중 열아홉 살에 고향 선배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한 후 조롱과 따돌림에 시달리고,
역시 고향 선배인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실제 인물러 알려져 문단에서 유폐된 한국 여성 최초의 작가.
창조, 개벽, 매일신보, 문장, 별건곤, 삼천리, 신여성, 신태양, 폐허, 조광은 김명순을 소재로 냉소와 멸시의 글을 실은 잡지들.
곡시의 장르는 '미투'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데이트 강간이 최근의 풍조가 아니었다는 점도 충격적이지만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속된 말로 두번 죽인 사람도 고향선배라는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살떨리게 아프게 다가옵니다.
미투 운동이 불같이 일어나면서 고은 시인이 거론되었을 때 보도를 다시 확인했었죠.
곡시의 김동인도 부정적 의미로 놀랐습니다.
뉴스는 대부분 불미스런 사건들의 주인공들을 A씨, B씨 정도로 감추죠.
그에 비해 곡시는 김동인, 전영택, 김기진, 방정환, 이응준이라고 밝혀주니 참 시원합니다.
누군가에게서 들었습니다. 강간당한 여자에게 경찰이 강간한 남자의 성기를 그려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할말을 잊었었죠.
여자라는 사실은 선천적 핸디캡이라 생각했는데 시인은 여전히 식민지에 산다고 표현하네요.
다시 씁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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