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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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책읽기] 시읽기 고정희 집소소한이야기 2021. 6. 23. 23:12
집 고향집 떠난 지 십수 년 흘러 어머니, 스무 번도 더 이삿짐을 꾸린 뒤 가상하게도 이 땅에 제 집이 마련되었습니다 경기도 안산에 마련한 이 집, 서른일곱의 나이에 가진 이 집, 열쇠를 가진 지 두 해가 넘도록 아직 변변한 집들이 한번 못하고 동당거려온 이 집에 어머니, 오늘은 크낙한 고요와 청명이 찾아오고, 구석구석 청소를 끝낸 후 저 들판 마주하여 마음을 비워내니, 간절한 사람, 어머니가 이 집에 들어서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가 이 집을 돌아보는 꿈을 꿉니다 공부방 둘러보고 이부자리 만져보고 유리창 활짝 열어 햇빛 들여오시며 이제 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해거름녙 강물처럼 웃으시는 당신, 그 얼굴 그리워 모서리칩니다 그 얼굴 보고 싶어 가슴 두근거립니다 왜 그닥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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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책읽기] 시읽기 고정희 탈상소소한이야기 2021. 6. 22. 23:06
탈상 구월입니다, 어머니 음력 보름달빛 낀 새벽 강물이 흘러갑니다 우수수수 음력 보름달빛 낀 새벽 들판이 함께 굽이칩니다 음력 보름달빛 낀 보석 같은 눈물들을 쏟아놓고 한여름의 상처와 슬픔으로 얼룩진 검은 상복 고이 벗어 한줌 재로 강물에 띄워보내고 나면 적막한 산하 옥수수밭 흔들며 가을의 전령들이 당도하고 있습니다 아득한 저 벼랑 끝에서 산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아득한 저 벼랑 끝에서 신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오, 우리 가슴속에 아직 검은 그림자 드리워 저 바람 지나기엔 이른 시간일지라도 보시지요, 어머니 구월이 왔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상복을 벗고 지친 형제자매들의 팔다리 부축하여 황금 들녘에 기립할 때입니다 풀벌레 울음 소리 자욱한 일터에서 겸허한 씨앗들을 쓸어안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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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책읽기] 시읽기 고정희 유채꽃밭을 지나며소소한이야기 2021. 6. 21. 22:36
유채꽃밭을 지나며 어머니, 이제 더는 말이 없으신 어머니 당신의 시신을 뒷동산 솔밭에 묻고 제 가슴에도 비로소 둥긋한 봉분 한 구 솟아버린 채 서른아홉의 짐을 끌고 고향을 하직하던 날 소리나지 않게 울며 대문 밖에 서계시는 어머니와 손 흔들던 날 저산리 모퉁이를 돌아서던 제 시야에 오늘처럼 눈부시게 흔들리는 유채꽃밭을 보았습니다 백야리를 지나고 배드레재 지날 동안 저를 따라오던 유채꽃밭에는 호랑나비 노랑나비 훨훨 날아들어 이 세상의 적멸을 쓰러뜨리며 찬란한 화관을 들어올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화관을 들어올리고 있었습니다 제발 가슴속의 봉분을 버려라 찾아오면 떠나갈 때가 있고 머물렀으면 일어설 때가 있나니 사람은 순서가 다를 뿐이다 유채꽃밭 속으로 걸어가던 어머니 그날처럼 오늘도 산천솔기마다 유채꽃 흐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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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책읽기] 시읽기 고정희 하관 비문소소한이야기 2021. 6. 21. 00:11
하관 지상에 매인 포승을 풀고 검은 침묵에 싸인 관을 내렸습니다 차디찬 단절과 오열을 젖히며 소낙비 한 줄기 관을 적셨습니다 세상 시름 씻어가는 보혈의 눈물이여 세상 번뇌 거둬가는 부활의 바람이여 애지중지 키우신 동백꽃 한 송이 마지막 하직길에 합장하니 사방에 흩어진 고별이 일어나 천 가람과 교신하던 문을 닫았습니다 가슴에 봉분 한 구 솟아버린 사람들이 태어난 젖줄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오 하느님, 칼을 쳐서 밥을 만들고 창을 쳐서 떡을 만들던 손 그가 여기 잠들었나이다 우리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우리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며 우리가 곤궁했을 때 기댈 등을 주던 몸 그가 여기 잠들었나이다 하늘문 열으소서 그의 영혼을 손잡으소서 비문 순전한 흑에서 태어나 흙과 더불어 흙을 일구고 온전한 흙으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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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책읽기] 고정희 수의를 입히며소소한이야기 2021. 6. 17. 23:27
수의를 입히며 논두렁 밭두렁에 비지땀을 쏟으시고 씨앗 여물 때마다 혼을 불어넣으시어 구릿빛 가죽만 남으신 어머니, 바람개빛럼 가벼운 줄 알았더니 어머니 지신 짐이 이리 무겁다니요 날아갈 듯 누우신 오 척 단신에 이리 무거운 짐 벗어놓고 떠나시다니요 이 짐을 지고 버티신 세월 억장이 무너지고 넋장이 부서집니다 굼ㅇ이란 구멍에 목숨 들이대시고 바람이란 바람에 맨가슴 비비시어 팔남매 하늘을 떠받치신 어머니, 당신 칠십 평생 동안의 삶의 무게가 마지막 잡은 손에 전류처럼 흐릅니다 당신 칠십 평생 동안에 열린 산과 들의 숨소리가 마지막 포옹에 화인처럼 박힙니다 얘야, 나는 이제 너의 담벼락이 아니다 흘러라 내가 놓은 징검다리 밟고 가거라 뒤돌아보는 것은 길이 아니여 다만 단정하게 눈감으신 어머니 아흐, 우리 살아..